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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by 책연필씨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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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마이클 샌델의 책이다. 이번엔 공정함에 대해 다룬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가진 능력을 힘껏 펼쳐 성공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만연해 있는 이 능력주의. 이러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할까?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능력주의는 당연히 학력주의 문제로 직결된다. 그런데 만일 대학 학위가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전제조건이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킨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학력주의라는 편견은 성공한 자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준다.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아도 그에 대해서는 별로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에 대해서 말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삼분의 이 이상이 소득 상위 20퍼센트 이상 가정의 출신이고, 프린스턴과 예일에는 미국의 소득 하위 6퍼센트 출신 학생보다 상위 1퍼센트 출신 학생이 더 많다. 이 엄청난 입학 불평등은 일부 동문자녀 입학과 기여 입학제 때문이지만, 부잣집 학생들은 날개를 달고 정문으로 날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하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부자 부모는 자녀를 SAT 모의 응시 과정에만 넣는 것이 아니라, 사설 입시 카운슬러를 고용해 입시 스펙을 다듬어준다. 대학 운동부에 뽑히기 쉬운 엘리트 체육을 익히게 해준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을 어필하기 위해 해외 봉사활동도 알선해준다. 이런 것들은 다 부유한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명문대 입학 자격을 따주기 위해 벌이는 돈이 많이 드는 일들이다. 거기에 학비 문제도 있다.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 있는 학생들은 그게 절실한 학생들에 비해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능력주의.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불평하는 건 보통 그 이상에 대한 게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불평이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능력주의 옹호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 경쟁의 승자는 보상받을 만하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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