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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백 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 밝은 밤 (최은영)

by 책연필씨 2022.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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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잔잔하게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큰 사건이나 대단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책 속에 푹 파묻혀서 있다 나온 기분이다. 요즘 젊은 여성 작가들의 글이 참 좋다. 특히 소설을 쓰는 작가들.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푹 빠지게 되는 것 같다. 최은영 작가도 처음엔 이름이 낯설었는데, 글을 읽다보니 어딘지 낯익음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내게 무해한 사람들의 작가님이셨다. 이럴 때 또 한 번 반가움이...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엄마는 내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노후가 보장된 부모에 착한 남편,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복은 차고 넘쳤다.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유지되고 있었던 결혼생활을 굴려나가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웃던 내 모습이.”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된 지연. 평생 자기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남편은 외도에 대한 사과도 없이 모든 것을 지연 탓으로 돌리고, 그런 지연을 보듬어주기는 커녕 때리지도 않고 도박도 하지 않는 남편이 바람 한번 피운걸 못참고 이혼했다고 딸을 나무라는 엄마. 꿋꿋하게 버텨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어릴 때 잠깐 와본 희령의 천문대에 일자리가 생긴 기회로 서울을 떠나 희령으로 오게 된다.

 

 

 

그런 희령에서, 그것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20여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외할머니. 처음엔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할머니 집을 조금씩 드나들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연의 마음은 조금씩 치유가 되어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너무도 닮은 옛날 사진속의 여인.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멸시와 남편의 무시를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지연의 증조할머니.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지연은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무나 험난했던 증조할머니의 삶.

그런 증조할머니를 유일하게 삼천아하며 이름 불러주고 한명의 사람으로 사랑해준 새비아주머니의 삶.

전쟁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었던 두 분의 삶과 우정.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서 이어지는 할머니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엄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만 했던 수많은 상처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지는 그들의 슬픔과 삶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치유해나가는 지연.

 

 

1930년대 배경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과하게 몰아붙이지 않지만 담담하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이야기 전개가 너무 좋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최은영 작가의 다른 책도 읽을 것만 같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내게 도착한 이야기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만들어졌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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