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부터 탈고까지 무려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1, 2권으로 나뉘어 소설의 길이도 상당하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4세대에 걸친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의 삶에 대한 서사적인 이야기라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 이야기의 전개가 빨라서인지 1910년부터 1989년까지의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강렬하다. 선자(or 순자)네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든 내 가족, 내 자식을 살려야하고 그래서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그 시대 우리 민족,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들이 모두 가슴속에 품었던 말이 아닐까.
부산의 영도 바닷가. 가난한 집 막내딸 양진은 나이도 많고, 언청이에다 한쪽 발도 뒤틀린 기형아 훈의 아내가 된다. 다행히 훈은 장애가 있지만, 따뜻하고 성실한 사람이고 시부모님도 좋으신 분들이라 양진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산다. 두 사람의 딸인 선자는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 곧고 튼튼하게 성장한다.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엄마와 하숙을 치면서 생활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고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고한수를 사랑하지만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선자는 고한수와 결별하고, 평양에서 온 이삭의 아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하게 된다. 선자는 이삭의 헌신에 진심으로 이삭을 사랑하고 노아와 모자수를 낳는다. 하지만 몸이 약한 이삭이 교회 목회 활동 중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삭의 형 요셉은 여자들이 밖에서 돈을 버는 행동을 탐탁치않게 여기지만, 노아와 모자수를 키우기 위해 선자와 경희는 길에서 김치를 팔게 되고, 맛있다는 소문이 나서 김창호가 일하는 식당에서 김치를 담그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식당은 고한수가 운영하는 식당. 고한수의 도움으로 오사카가 피격당하기 전 피난도 가게 되고, 영도에 있는 엄마 양진도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자리를 잡는데도 고한수가 도움을 주지만 선자는 고한수가 노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노아에게 알리지 않고 고한수를 멀리 한다.
이삭처럼 책보기를 좋아하고 공부를 잘하던 노아는 와세다 대학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하다가, 자기가 존경하던 이삭과는 너무나 다른 야쿠자인 고한수가 자기 생부라는 걸 알게 된다. 큰 충격을 받은 노아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해 파친코에서 일하며 일본인으로 살아간다. 가족까지 꾸리며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선자가 찾아와 만난 다음날 자살을 한다.
모자수는 노아와는 달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학교에서 자신을 무시하거나 건드리는 아이들은 주먹으로 손봐주는 소위 ‘나쁜 조선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파친코 사장 고로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성실하고 유능한 파친코 사업가가 된다. 미국을 동경하는 유미를 만나 결혼해 솔로몬을 낳고, 그 솔로몬은 국제 학교를 다니며 유복하게 자란다.
유복한 환경에서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란 솔로몬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해고된다. 그리고 솔로몬은 아버지 파친코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이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무려 80년간의 이야기를.
왜 제목을 ‘파친코’라고 지었을까?
선자의 아들 모자수, 그리고 일본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했던 노아, 유학까지 다녀온 솔로몬까지 모두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일본에서 파친코라는 사업은 도박이라는 점,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단연코 좋은 인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재일조선인들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온갖 편견과 멸시, 불평등 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돈이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극 중에서 파친코 사장 고로는 ‘뜻밖의 횡재를 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수’를 충분히 남겨두어 운을 시험해보려는 손님들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파친코는 일말의 ‘희망’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재일조선인들이 얼마나 부당하게 고통받으며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눈물콧물 짜내며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닌,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전개 방식으로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내는 소설인 것 같다. 재미교포의 시각으로 재일교포의 삶을 풀어내서 더 그런 것일까?
'북'S 다이어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천도서] 꼭두각시 살인사건 – 다니엘 콜 (0) | 2021.05.06 |
---|---|
[추천도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2) | 2021.04.30 |
[추천도서] 나를 숨 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2) | 2021.04.22 |
[추천도서] 더 좀비스를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전형적인 소시민 아저씨의 변화상 - 플라이 대디 플라이 Fly, Daddy, Fly (가네시로 가즈키) (2) | 2021.04.17 |
[추천도서]더좀비스의 시작을 알리다 - Revolution No.3 레볼루션 넘버 3 (가네시로 가즈키) (0) | 2021.04.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