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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S 다이어리

[추천도서]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by 책연필씨 2021.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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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책이라 덜컥 집어들었다.

 

 

이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등을 읽었을 때의 강렬함과 아련함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작가들도 굉장히 노력하며 글을 쓰시겠지만, 한강이라는 작가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굉장히 예민하고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렇지만 주제는 굉장히 무겁다.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 그런 무거운 주제에 빠져있으면 얼마나 힘들까...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경하는 소설가이다. 5월 광주 항쟁에 대한 소설을 쓰고 나서 몇 년 째 악몽에 시달린다. 여러 작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 같다. 하루하루 유서를 고치며 버텨나가고 있다.

 

“악몽은 물론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경하의 친구 인선에게서 갑작스런 연락이 온다. 다큐멘타리 감독을 하던 인선은 치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제주도에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목공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히 육지로 후송된 인선이 경하에게 자신의 새를 부탁한다. 그렇게 제주도로 내려오게 된 경하는 폭설로 인해 인선의 외딴집을 찾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눈 속에 갇힌 듯한 그 외딴집에서 인선의 엄마, 정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인선의 입을 통해 작가는 194843일 제주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옆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 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경하는 당연히 소설 속 인물이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은 독자라면, 자꾸만 작가와 경하가 오버랩 되는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작가는 말했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마냥 달콤한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인선의 엄마, 정심의 평생에 걸친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사랑, 너무나 지극해서 더 고통스러운 사랑. 그런 엄마의 고통스러움을 알면서도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까지 그대로 품어버린 인선.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너무 필력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절절하게 슬프지만 아름답고, 고통스럽지만 섬세함이 느껴지는 작가만의 스타일에 다시 한번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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