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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김범석

by 책연필씨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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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군가의 죽음은 내일의 내가 닿을 시간이고,

어떤 죽음들은 분명히 아직 남아 있는 이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한다.

뜻하지 않게 자신이 떠나갈 때를 알게 된 사람들과 여전히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죽음’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그동안 치료하시면서 보고 느껴온 것들을 적어내려간 에세이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당연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도,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도 다 같을 순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가까이 여기거나 자주 생각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존엄한 삶에 대해서도.

 

한 평생을 술 마시고, 도박하고, 거기에 외도까지 하며 가족을 힘들게 하고, 결혼한 딸에게까지 찾아와 돈을 요구하던 아버지. 결국에는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둔 아버지. 증오해도 모자랄 만한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이 끔찍해서, 미운 부모라도 자식인데 할 바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딸은 힘들어한다. 부녀라는 이름의 혈연으로 묶인 악연이 피해자가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자책하게 만든 것이다.

 

가족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신체적, 정서적 폭력 앞에서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다라는 식의 논리를 어디가지 들이밀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그럴 수 있는 일인 걸까? 어떤 인간이든 어떻게 살아왔든 죽음은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연명의료 결정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환자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죽음보다도 못한 상태일 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까.. 잠깐 고민도 해봤다. 미국의 경우 암 환자들이 평균적으로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즉 항암치료가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남은 6개월은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니 서울대학교 병원의 경우는 2007년 조사 결과 마지막 항암치료와 사망까지의 평균적인 시간차는 60, 두 달이었다. 그리고 2017년 조사 결과는 항암치료와 사망까지의 간격이 30일로 줄었다. 죽기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80세 폐암 말기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가족들은 무조건 끝가지 최선을 다 해 달라고 얘기한다. 약한 체력이지만 힘든 항암 치료를 겨우겨우 버티시다가 응급실로 실려오게 되고, 거기서 중환자실로 올라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한 달여를 버티신다. 그러다 심장이 멈추니 심폐소생술이 시작되고, 할머니의 갈비뼈가 부러질 게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보호자가 도착할 때까지...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의사로서 고뇌하고 마음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의사 선생님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종양내과는 특히 임종 환자를 많이 보게 되서 정말 힘들 것 같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내는 환자들이 그런 순간에 죽지 않을, 살고자 할 용기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가. 환자의 모든 순간을 지켜볼 수 없는, 그 깊은 속까지 온전히 알 수 없는 의사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존엄한 죽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 의사로서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기심과 이타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미처 깨우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저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적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나온다.

 

“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나부터도 잘하지 못한다. 삶에 대한 의지와 집착은 한끝 차이이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일단 마음부터 편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떠나고 난 뒤 타인의 기억에 남을 내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내 가족의 미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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