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접하는 줌파 라히리의 두 번째 책이다. 『축복받은 집』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집어 들었다. 『축복받은 집』이 단편 소설집이었던 반면에 이 책은 가벼운 산문집이다. 두께도 가볍고 책 사이즈도 아담하다. 이탈리아에서 강연한 원고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라 그런가 보다..
이 책은 ‘표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인도 벵갈 출신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듯이, 이 책에서도 우리가 입는 옷을 통해, 책에 입혀지는 표지를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에서는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인도에서도 인도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것이 자기가 입은 옷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 유년시절. 작가는 교복이 입고 싶었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하나의 무명성을 즐길 수 있는 교복의 효과 때문에. 그렇지만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지 않으니 그것은 쓸데없는 갈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입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내겐 고통이었다. 내 이름, 내 가족, 내 외모가 이미 특별하다는 걸 의식했기에 나머지 면에서는 남들과 비슷하고 싶었다. 남들과 똑같기를, 아니 눈에 띄지 않기를 꿈꾸었다.”
“서른두 살 때 나는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나의 다른 부분이 옷을 입고 세상에 소개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내 말에 덧입혀지는 것, 내 책의 표지는 내 선택이 아니다.
(...)
책을 덮고 포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맞춤 재킷. 몸에 꼭 맞게 재단돼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내 책 표지 대부분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간혹 작가인 나는 표지도 유니폼이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표지가 꼭 필요한지 묻는다. 책이 홍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겠지만, 작가 개인적으로는 표지가 없는 책을 그리워한다.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아 내용을 알려면 책을 읽는 수밖에 없는 그런 책을.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
“표지를 처음 볼 때면 난 감동스럽기도 하지만 늘 당황스럽다. 표지가 설득력이 있고 흡인력이 있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늘 차이, 불균형이 있다. 표지는 이미 내 책을 알지만 나는 아직 표지를 모른다. 나는 익숙해지고 가까이 다가가려 애쓴다.”
“아무튼 표지는 작가와 이미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요한다. 강요된 관계이기 때문에 극도의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난 당장 멀어지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표지는 내 말을 만지고 내 말에 옷을 입힌다.”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표지 작업에 바라는 사항이 나온 대목이 있다.
“작가로서 나는 이 ‘시각적 메아리’를 찾지만 자주 실패한다. 표지가 내 책의 의미와 정신을 반영해주길 나도 바란다. 날 잘 알고 내 모든 작품을 깊이 이해하며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한 번만이라도 표지를 그려주면 기쁘겠다.”
작가는 어린 시절 도서관 사서의 딸로서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당시 날 사로잡았던 작가들은 그들의 말로만 자신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표지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시장이나 현실을 모른 채 내 첫 독서는 시간 밖에서 해해졌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표지를 의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때의 경험을 다시 찾고자 한다.”
“독자와 책의 관계는 이제 책 주변에서 움직이는 열두명 남짓 사람들의 매개를 통해 훨씬 더 많이 형성된다. 작가인 나와 텍스트,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발가벗은 책의 침묵, 그 미스터리가 그립다. 보조해주는 자료가 없는 외로운 책 말이다. 예상할 수 없고 참조할 것 없는 자유로운 독서를 가능케 하는 미스터리. 내 생각에 발가벗은 책도 스스로 설 힘이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평생 나는 서로 다른 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둘 다 내게 강요된 정체성이다. 이 갈등에서 자유로워지려 했지만 작가로서 나는 늘 같은 올가미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출판사는 내 이름과 사진을 보고는 인도를 연상시키는 틀에 박힌 것들 즉 코끼리, 이국적인 꽃, 헤나로 문신한 손, 종교적 혹은 정신적 상징인 갠지스 강 등이 담긴 표지를 이내 보내온다. 내 이야기의 대부분이 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며 그래서 갠지스 강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데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에게 잘못된 표지는 단순히 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느낀 불안이 다시 덮쳐오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난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옷을 입고 있고,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읽힐까? 난 그 질문을 피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대답을 찾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얇은 책이었지만 줌파 라히리의 색이 잘 묻어나는 글이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어땠는지, 책 표지에 많이 휘둘렸는지, 추천사나 작가의 이력에 매혹된 건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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