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의 책을 읽다가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영어 이름이 아니라 이름도 꽤 낯설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였지만 궁금했다. 다른 작가의 글을 읽다가 언급되는 책이나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꼭 베스트셀러가 아닐지라도 맘에 드는 작가가 읽어 본 책을 읽는다는 건 뭔가 공유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줌파 라히리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 책 『축복받은 집』은 줌파 라히리의 처녀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으로 펜/헤밍웨이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줌파 라히리 이전까지는 모두 장편으로만 퓰리처상이 돌아갔기 때문에 단편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렸더니 아주 낡은 책이 나왔다. 내가 읽은 것은 1999년에 발행된 아주 옛날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2013년에 발행된 책과는 표지도 다르고 목차도 다르고 번역도 조금은 다른 듯하다. 그래도 당시에 나왔던 상태로 읽는다는 생각에 뭔가 더 흐뭇하기도.
이 책은 9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다.
모두 인도인이 등장하고 외국(미국) 생활이 배경이 된다. 작가 자신이 인도계 미국인이고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배경도 이민 온 인도인들에 대한 것이라서 ‘이민자 소설’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작가는 ‘거주자 문학’이 따로 없는 것처럼 ‘이민자 문학’이란 없다며, 정체성을 규정당하기를 거부하고 문학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길 원했다고 한다.
나도 처음에 읽을 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하고 살아가는 인도인들의 이야기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다양한 이유로 낯선 곳으로 떠나와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도 사람들을 묘사한 듯한 이야기. 하지만 한편 한편 읽다보니, 단순히 인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과 인도 사람들이라는 표면적인 드러남만 그렇게 보일뿐, 낯선 환경과 낯선 삶을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외로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길지 않은 단편들이지만 짜임새가 참 촘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글 속에 갈등이나 사건이 있고, 그 갈등이나 사건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론이나 결과가 억지스럽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흔히 있을 수 있을법한 계기로 갈등이 생기고, 그런 갈등 속 인간의 마음을 구구절절 작가가 다 말해준다기보다는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을 묘사하듯 보여줌으로써 훨씬 더 몰입도를 높인 것 같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사소한 계기가 글의 사건이 되고 또 대단한 결론이 없이 흐르는 듯한 전개로 끝맺음이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뭔가 더 생각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
옆에서 직접 보면서 설명하는 듯한 세심한 묘사도 글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내가 이 말을 할 대 당신이 내 얼굴
을 보아 주었으면 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임신 소식을 알리던 날, 그녀는 그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던 농구 게임 중계를 꺼버리고, 오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당시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그녀가 또다시 임신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척하기는 싫었다.
- 「잠시 동안의 일」 중에서
“그게 무슨 뜻이니?”
“뭐가요?”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
(…)
로힌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매트리스를 차려고 했으나 미란다가 그를 꽉 눌렀다. 그는 침대 위로 벌렁 나자빠졌고 그의 등이 침대 널판과 나란하게 되었다. 그는 양손으로 컵을 만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 「섹시」 중에서
“다스 부인, 당신이 느끼는 것이 정말로 아픔입니까, 아니면 죄책감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겨자기름이 차가운 핑크빛 입술에 두텁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카파시 씨를 노려보는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를 아프게 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제대로 모욕당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질병의 통역사」 중에서
드디어 나는 과자 보관통에서 하얀 초콜릿을 하나 꺼내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전에 결코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나는 초콜릿을 내 입 속에다 넣고 그것이 다 녹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그것을 천천히 삼키면서, 피르자다 씨의 가족이 안전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나는 전에 기도를 올려 본 적도 없었고, 기도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처럼 기도를 올리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욕실에 들어가서 나는 이를 닦는 시늉만 내었다. 내가 입을 헹구어 버리면 나의 기도가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중에서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되면 네 인생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전개된단다.”
- 「센 아주머니의 집」 중에서
“걱정하지 마. 그들이 나를 여기에다 감금한 것은 아니니까.” 그녀가 우리를 안심시키면서 말했다.
“세상은 계단의 바닥에서 시작되는 거야. 난 이제 내 마음대로 인생을 발견할 수 있어.”
-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 중에서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 나는 나의 업적이 평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출세하기 위하여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고 또 내가 첫 번째로 진출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여행한 그 모든 거리, 내가 해온 그 모든 식사,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 내가 잠잤던 그 모든 방 등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것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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