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시’란 조금은 어렵다는 생각에, 깊이 사색하며 읽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좀처럼 쉽게 집어들지 않게 된다.
그러다 그냥 ‘내 맘 가는대로 느끼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똑같은 시도 읽는 날의 날씨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번 시집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시들 몇 개를 적어본다.
지나가는 바람
그때 난 인생이라는 말을 몰랐다
인생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어른들이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거나
어쩌면 니아들어서나 의미를 갖게 되는 말인 줄로만 알았으며
나는 영원히 그때가 오게 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해줄까
언제나처럼 나에게 그렇게만 물어오던 오전 열한시였는데
예고 한 번 없이 인생이 여기 구석까지 찾아왔다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혼자 어느 음식점에 갔다가 난데없는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온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묻는다
아, 그냥 우연이겠지
인사와 안부 모두가 내가 속하는 집합의 순간들이겠지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
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늘 드시는 걸로 드릴게요, 라고 한다
나는 수굿하게 그러라고 말한다
판이 어떻게 도라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배우로 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하는 일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
형은
형은 그린란드로 갔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며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어쩌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니
남들이 여행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형은
그린란드 여행중에 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으나
가방에 든 오래된 카메라가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형은 그린란드에 가기 위해 두 군데를 들러야 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있다는 기분은
가는 동안의 시간에 제대로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린란드 요리로 순록을 먹은 그다음날이었다
빙하로 덮인 곳에서 흰곰을 발견했다
흰곰이 먼저 형을 발견하고 접근한 건지도 몰랐다
형은 곰을 사진 찍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곰이 형이 주변을 동그랗게 그것도 여러 번 돌았다
그때마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긴장하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기
처음엔 흰 빙하뿐이어서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으나
곰이 그리는 동그라미의 반경이 조금씩 조금씩 조여드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누가 형에게 어제 그곳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어제 마주친 그 곰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었고
새벽에는 그걸 처리하고 왔다며
그 곰털 가죽을 사지 않겠냐고도 물었다
왜 곰은 성큼 달려들어
형을 누르고 팔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형이 그 사실을 듣게 된 그날은 밤새
창백한 햇빛을 받으며 초록색 비가 내렸다고 했다
어느 날부터 형은 전화가 되지 않았다
형의 카메라 안에는 곰 사진이 여러 장 있을 거였다
집
새는 집을 짓겠다고 결정한 다음
마른 가지 하나를 물고 와 나무 위를 돌고 돌면서
마지막까지 주저하고 확인한다
정말 여기 집을 지어도 되는 것인가를
자신의 나머지를 맡겨도 될 공중의 한 뼘인가를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가늠할 수 있다면 그 새를 아주 오래 지켜보던
나쯤 되는 사내일 것이다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그린란드상어의 눈에 붙어 터를 잡고 사는 수중벌레는
상어 눈동자의 조직을 빨아먹으면서 평생을 산다
그래서 그린란드상어들 거의가 시력을 잃게 되면서부터는
심해에서 춥고 어둡게 살아간다
벌레가 오백 년도 넘게 산다는
그린란드상어의 눈을 빌린 것은
오백 년을 같이 살겠다고 그랬던 것은 아닐 텐데
상어는 벌레가 죽고 나서도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정물
햇볕이 좋아 뭐라도 하자 싶어
신문지 넉 장을 펴놓고 쌀을 널어 말렸다
잘 마른 쌀을 다시 큰 유리병에 담는데
쌀 틈 사이로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공기가 많은 병의 위쪽으로
타고 올라올 거라 생각했던 개미는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길로 멀리 펼쳐진 뜻밖의 길
개미를 살려내야겠다 싶어
쌀을 퍼내는 사이
그 얼마 안 되는 동안을 고투하지 못하고
개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을 놓은 것이다
몇 천 톨의 쌀에도 눌리지 않던 개미는
필사적으로 길을 잃었다
개미는 얼마 안 되는 공기의 밀도를
잘못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밥을 지으려 쌀을 씻을 때나
쌀뜨물 위로 떠오르는 개미를 지켜보게 될 거시며
개미의 최후를 지켜봤다는 사실 또한
수챗구멍으로 처리되겠지만
지금 내 이마에 닿는 공기가 아까의 공기보다
더워지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개미 무게도 쌀 한 톨의 무게도
내가 모시고 사는 헛것의 무게보다 무거울 거라서다
세상의 끝
병실에 누워 있는 당신이
당신은 아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기운 하나 없이 누운 채로 당신은
어렵게 목에다 힘을 모으더니
너를 생각하면 내가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어렵게 시작했다 급히 사라지려는 봄이 창밖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꽃들에게도 너가 있거나 내가 있어서 아플까 싶은데
당신은 무엇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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