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2014년 가을,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을 때 내게는 누군가의 죽음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걸 어떻게든 소설로 쓰지 않으면 소설 쓰는 일이 여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주 어려워질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종래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언가가 심각하게 파괴된 것처럼 종래 내가 쓴 소설 속 누군가가 파괴될 필요가 내게는 있었고 나는 「디디의 우산」을 선택했다.
「디디의 우산」을 선택한 이유는 디디가 혁명, 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디디의 우산』은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함께 실린 연작 소설이다.
연작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연결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사건의 교차점이 존재하는 글이다. 최근작 『연년세세』를 읽고 이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고른 책이었는데, 상당히 무거웠다. 소설이라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었다...
<d>
d와 dd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어렸을 때 낙뢰가 떨어진 날 학교에 함께 있었고 낙뢰가 떨어진 자리의 뜨거움을 손가락으로 같이 느꼈는데, d는 기억하지 못한다.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나 dd의 우산을 같이 쓴 계기로 가까워져 둘은 같이 살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d는 사물에서 자꾸 온도가 느껴져 괴롭지만, dd를 만난 이후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그러다가 dd가 갑작스런 버스사고로 죽어버린다. 사고 이후 d는 dd와 함께 살던 반지하방에서 칩거하며 죽은 사람처럼 몇 달을 지낸다. 그러다가 방에서 나와 멀쩡한 사람도 몇 달을 버티지 못하는 세운상가 택배일을 시작한다. 쇠락해가는 그곳에는 사십 년간 전축 수리를 하고 있는 여소녀가 있다. 잘못 배달된 택배를 통해 여소녀와 말을 트기 시작한 d는 여소녀의 가게에서 전축을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되고, 그곳에서 dd가 즐겨듣던 음악을 들으며 조금씩 치유되며 나아진다.
<d>의 이야기 속에는 dd의 죽음과 더불어 이웅평 대위의 귀순, 세운(世運)상가, 광화문 촛불시위 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모두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나 잘 되지 않는, 그래서 ‘좌절’하는, ‘환멸’을 느끼는...
d는 dd의 죽음 이후 그 슬픔으로 고립된 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날 생각조차 못한다. 이 세상에 대한 환멸만이 남은 채.. 그래서 dd의 물건도 모두 보내버린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그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 이자 다음.
d는 매 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 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 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의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재정비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자들의 계획에 따르면 여 소녀 자신과 같은 기술자들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콘텐츠였으나…… 기술자이자 상인인 그들 모두 결국은 세입자이며… 세가 오르면 특별히 영세한 업체가 많은 이 상가에서 상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일격이 될 수도 있었다. 여소녀는 생각했다.
상가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무릎에 펼쳐진 신문이 바람에 부풀었다. 여소녀는 신문을 두 번 접어서 조금 더 자세히 읽고 싶은 기사를 위로 오게 해 두었다. 세운상가 활성화 종합계획이 발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본문에 다섯 차례나 언급된 재생이라는 말이 여소녀는 마음에 걸렸다. 무엇을 재생한다고?
왜?”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에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 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017년 3월 10일. 나(김소영)와 서수경이 같이 사는 집에 김소리, 정진원이 놀러 와 낮잠을 자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의 순간을 모두 다 함께 지켜보고 조용하게 모두들 낮잠에 든 상태. 온 식구들을 깨우기 전 과거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나와 서수경은 중학교 때 육상대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가, 나중에 ‘연대 사태’를 통해 다시 만나 20년째 같이 살고 있다.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차별적이었던 그날 이후 ‘자기 앞마당이나 쓸자’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면서도 1996년 연대 사태 이후 2008년 명박 산성, 2009년 용산 사태, 2014년 세월호 사건, 2016년 촛불 집회까지 모두 온몸으로 겪으면서,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오게 된다.
<d>가 ‘좌절’과 ‘환멸’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차별과 탄압에 대한 이야기이다. 힘없는 사람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탄압에 대해. 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김소영과 서수경에 대해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너희가 무슨 관계인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묻는 우리의 이웃은 그것이 정말 궁금할까? 그 ‘궁금함‘의 앞과 뒤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일까? 예컨대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협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
아니야 언니.
라고 김소리는 말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반드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그럴 때의 상식이란 감도 생각도 아니고...... 그저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고 저 이야기는 저렇게 끝나는 것이라는 관습적 판단일 뿐 아닐까.”
‘나’는 집회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도 똑같은 사람으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인식되는, 그렇게 여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상황들에 답답해하면서도 분연히 나서지 못하는 모습에 씁쓸해하고 고민한다.
강지희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의 감격이 날카롭게 단절되는 지점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328쪽)이 손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세계와 마찰한 기록이자, 그들까지 끌어안고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작가의 노력이다.
상식과 묵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혐오와 폭력을 막아주는 우산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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