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S 다이어리

[추천도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 심채경

by 책연필씨 2022. 4. 14.
728x90
반응형

 

제목에 끌렸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도 모르는 채 빌려왔다.

몇 장 후루룩 넘겨보고 천문학 관련 책인가보다, 딱딱한 책이겠구나 하고 책꽂이에 몇일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다 잠깐 비는 시간이 생겨 이 책을 챙겨들었다. 별 기대도 없이.

 

프롤로그부터 빠져들었다. 그리고 프롤로그부터 심채경 박사님의 글솜씨와 천문학에 대한 사랑이 잔잔하게 느껴졌다.

 

 

 

거리와 각도, 시차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옴싹 달라붙어서,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애쓰며 점 두 개를 칠판에 찍고는 돌아서서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 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하다못해 아름다운 '연주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시차. 지난 십몇 년 동안 한 해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연주시차 따위가 저 사람을 그리 즐겁게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일 년 뒤, 나는 지구과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어쭙잖은 상을 탔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 교수님께 기본천문학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 연세에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셔서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 무관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릴 대면 어찌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대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중략)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각자 얼마나 멍청한 일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씩 웃으며 당신께서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중략) 마치 일주일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랩 미팅의 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온 당신의 모델을 육십이 넘도록 끊임없이 바꾸고 고치고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즐겁게.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기는 좋아하지만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는 정말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따분하고 어렵게만 여겼을 뿐.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선입견을 조금 벗은 것 같다. 물론 전문적인 학술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나처럼 선입견을 가진 사람도 천문학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천문학 강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든건 심채경 박사님의 글솜씨가 아닐까 한다.

 

 

 

 

 

우주에 대한 설명을 하실 때도 장황하지 않고 말투도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깔끔하다. 그런데 딱딱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자신의 전문 분야이기에,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사랑하기에 가능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박사님의 우주에 대한 사랑이 잘 느껴진다. 그래서 나 같은 문외한도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연구 과제가 승인을 받지 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하는 비정규직 행성과학자. 돈도 못버는 학문이라는 편견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사랑하는 천문학자.

 

그렇기에 글 속에서도 위트와 자신만의 소신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에 대한 글과 존경하는 여자 교수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기술한 부분에서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여전한 편견과 차별이 보여진다. 이런 부분을 이야기할 때도 과격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게, 조곤조곤 그렇지만 날카롭게 얘기한다.

 

 

오랜 시간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건 아무나 못할 일이다. 그렇기에 멋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일을 너무나 좋아하기까지 한다면... 아니, 너무나 좋아하기에 오랫동안 노력과 시간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거기에 이렇게 글솜씨까지 뛰어나시다니...

 

 

 

 

오랜만에 소장하고 싶은 책이 한권 더 생겼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