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후반은 김초엽 작가를 위한 시간인가보다.
『방금 떠나온 세계』를 출간하고 불과 몇 주 만에 『행성어 서점』까지 출간하다니.
그 전에는 『지구 끝의 온실』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행성어 서점』은 『방금 떠나온 세계』보다 훨씬 더 짧은 소설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 두께도 얇고 이야기들도 워낙 짧아서 잡은 순간 거의 한 번에 읽을 수도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다 읽고 나면 어디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뭔가 아주 색다른 체험을 하고 나서 그것을 계속 곱씹게 되는 그런 여행.
한 편 한 편 이야기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한 편 한 편 마다 김초엽 작가만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짧지만 굉장히 강렬하게 여운을 남겼다.
“나는 팔을 벌려 그 애를 안았어. 끝까지 안고 있었지. 비명을 참고 눈물을 참으며, 피부 표면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생각하면서. (…) 그때 나는 불행히도 나에게 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 - 「선인장 끌어안기」
기묘한 동정과 시혜적 태도가 섞인 댓글들을 볼 때면 리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대개의 댓글은 만족스러웠다. 아름답다, 예쁘다, 평범한 눈보다 사랑스럽다, 비율로 따지자면 그런 반응이 더 많았다. 유기체 눈을 가진 사람들이 리지를 동경할 때마다 리지는 가슴 깊이 꿈틀거리는 어떤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자긍심일까? - 「#cyborg_positive」
“나는 이쪽 세계에서 멜론을 팔고, 저 녀석은 그쪽 세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어느 세계에 있든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그리고 우리는 이 거리에서 종종 마주친단다. 또 다른 나를 만난 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자주 마주치는 건 우리 둘이었어. 세상의 틈새로 가끔 끼어드는 불가피한 우연 같은 일이지.” -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
“우리의 현실이 정말로 같을까? 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진실한 대화일까? 너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어떤 사람은 수요일에서 바닐라 냄새를 맡고,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이 결코 구분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빨간색을 구분하지. 우리는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의 관점을 상상하지 못하겠지. 자신의 수천 배나 되는 몸집을 가진 동물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진드기의 관점을 헤아려볼 수도 없겠지.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타인의 현실의 결에 완전히 접속하지 못할 거야. 모든 사람이 각자의 현실의 결을 갖고 있지. 만약 그렇게, 우리가 가진 현실의 결이 모두 다르다면, 왜 그중 어떤 현실의 결만이 우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까?” - 「데이지와 이상한 기계」
인류의 모든 뇌에 수만 개 은하 언어를 지원하는 범우주 통역 모듈이 설치된 이 시대에도, 어떤 이들은 낯선 외국어로 가득한 서점을 거니는 이국적인 경험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방인으로서의 체험. 어떤 말도 구체적인 정보로 흡수되지 못하고 풍경으로 나를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경험……. - 「행성어 서점」
개별적 개체성, 그게 인간일 때의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었어. 동시에 나를 살아가게 했지.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일부라는 건 모순이 아니야. 아니면, 전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 「늪지의 소년」
“가면이 우리에게 온 이후로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면은 거짓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시몬 사람들이 여전히 가면을 쓰는 이유랍니다.” - 「시몬을 떠나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린 예전보다 행복해요. 이 작은 친구들이 우리의 옆에 머물러주기에, 인류는 더 이상 우주의 외로운 먼지 조각들이 아니에요.” _ 「우리 집 코코」
“그래, 나는 상관없어.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니까. 그 오염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니까.” - 「오염 구역」
그래도 어느 순간 다현은 인생의 쓴맛이라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선가 그런 맛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사장과 나누었던 기묘한 점심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다른 행성에서 스쳐 지나갔을지 모르는 그와의 대화를, 그리고 구름을 한 스푼 떠먹는 느낌이었던 푸딩의 맛을. 그러다 보면 혀끝에 약간의 알싸한 단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
“분명한 건 우리가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변형되었고,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 「가장자리 너머」
우리와 다른 존재, 보통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존재들을 대하는 작가의 마인드가 그대로 드러난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이야기.
김초엽 작가의 다른 글들도 얼른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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