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작가님의 책은 처음 읽었다. 다른 작가님의 글에 인용이 된 문구가 있어서 일부러 찾아 읽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귀여운 표지와 제목만을 봤을 때는 그저 어린이들과의 에피소드들을 엮은 책인가보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미소가 번지는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단지 어린이들에 대한 생각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세상, 사회 약자가 살아가는 세상, 우리가 만드는 세상 등등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독서 교육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셔서인지 책이 굉장히 편안하게 읽혀졌다. 아이들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진중한 생각으로 넘어가는 것도 아주 좋았다.
무심히 지나치는 아이들의 행동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아이들과의 마음의 눈높이를 맞추며 아이들을 대하시는 모습이 여느 부모들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위가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훈육과 지도라는 일방적인 방식보다 많은 대화와 상호교감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단지 부모들만이 아닌 모든 어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부드럽고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확고하고 단호한 심지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는 있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수업을 하러 선생님네 아파트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단다.
“근데 제 옆에 어떤 아주머니, 그런데 아주머니라는 거는 제 생각이고 어쩌면 할머니일 수도 있어요, 아무튼 그 여성분이요, 저를 처음 보셨을 수도 있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분이 제가 가방을 메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보였나 봐요. ‘공부하러 가니?’ 하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네’ 했거든요? 그랬더니
‘일요일인데 공부하느라고 힘들겠구나’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왠지 조마조마했다. 혹시 주이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게 이상하다거나 오히려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하고.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어?”
“뭐라고 해야 하지? 위로가 됐어요. 그런 날은 운이 좀 좋은 것 같아요.”
“위로가 됐어요”라고 할 때 주이는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이 이따금 생각난다. 평소 주이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 세계라는 사실을 그날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만일 어린이가 보는 방식으로 보고 싶다면 내가 작아지는 것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커진다고 상상하는 쪽이 낫다. 길을 걷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누군가의 허벅지나 허리가 있다. 버스 타이어 지름이 내 키만 하다.(…)
부끄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동안 나는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격차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영역이 얼마나 많을까?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둔감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어른들은 어린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울리고 싶어 한다.
어린이가 우는 모습조차 귀여워서 그럴 것이다. 그저 장난으로, 어린이의 오해를
유도해서 울게 만든다. 그 우는 모습을 ‘반응’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한다.
잠깐이니까, 울고 나서 달래면 되니까, 정말로 큰일은 아니니까, 귀여워서 그러는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이만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하다. 어린이를 울릴 수도, 울음을 그치게 할 수도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포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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