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가장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좋아한다. 가벼운 템포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소설을 읽을 때와는 자세나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힐링’이나 ‘위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에세이들이 많다. 내용도 다 비슷비슷하고 말투마저 비슷비슷한. 그래서 언젠가부턴 에세이에 대한 기대를 좀 접은 듯하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그러라 그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양희은 님의 목소리와 너무 잘 어울리는 말. 감히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하지 않고, 담백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게 써내려간 글. 읽는 내내 양희은 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특유의 말투와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담백한 묵직함이 좋았다. ‘꽃다운 나이 칠십 세’가 아직 되지 않은 나는 이 정도의 마음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어린 시절 불행한 가정 탓에 돈 때문에 노래를 시작하고, 젊은 시절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 최고의 가수지만 여전히 노래 부를 때는 떨리고 긴장된다는 사람. 일 바깥의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나도 나이 칠십이 되면 위로가 아닌 공감을 할 줄 알고, ‘그저 나’에 만족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까?
오랜만에 참 좋은 에세이를 만났다.
“나와 다른 시선이나 기준에 대해서도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 하고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옳다’거나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같은 노래에도 관객의 평이 모두 다르듯 정답이랄 게 없었다. 그러니 남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살아서 얽힌 마음들을 채 풀지 못하고 떠나면 남은 사람의 후회는 끔찍하단다. ‘왜 그 말을 안 했을까? 사랑한다고 왜 말 못 했나’ 하는 후회들이 마음을 갉아먹는단다. 후회가 남지 않는 헤어짐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작은 돌부리엔 걸려 넘어져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고,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한다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세상천지 기댈 곳 없고 내 편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을 때, 이런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위로하며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다시 한 발작 내딛게 해준다.”
“왜 상처는 훈장이 되지 못하는 걸까? 살면서 뜻하지 않게 겪었던 아픔들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어떻게 아무런 흉도 없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제 겪은 만큼’이란 말이 있다.
나는 내가 가진 상처 덕분에 남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한 눈과 마음이 있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위로라는 말은 좀 버겁다. 가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내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어쩌다 내 노래에 위로받았다는 분들을 뵌다. 아마 슬픈 노래를 내가 많이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슬플 때 더 슬픈 노래를 들어야 위로를 받는달까?
고단한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내 노래가 지친 어깨 위에 얹어지는 따뜻한 손바닥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의 위로라면 좋겠다. 토닥여줄 줄도 잘 모르지만, “나도 그거 알아” 하며 내려앉는 손. 그런 손 무게만큼의 노래이고 싶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묻는 이들이 있다.
덮쳐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선 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살면서 힘든 날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어떻게 쉽기만 할까?
인생길 다 구불구불하고, 파도가 밀려오고 집채보다 큰 해일이 덮치고, 그 후 거짓말 같은 햇살과 고요가 찾아오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세상엔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 못 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땐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하늘을 볼 일이다.
미련한 성격 탓에 맞서오는 파도를 피할 줄도 모르고 온몸으로 맞고 선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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